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이우스 마리우스 (문단 편집) === 집정관 킨나 === 술라의 강요로 맹세를 한 두 집정관 중 하나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민중파에 해당되는 사람이었으며 마리우스의 지지자였다. 이런 킨나의 당선은 로마 시민들이 명백히 술라의 로마 진군이라는 만행과 그의 독단적인 법안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킨나는 술라에게 맹세를 하긴 하였으나 그는 이 맹세는 강요에 의해 된 것이므로 지킬 의무가 없다고 말하였고 술라가 그리스에 상륙하자 과거 루푸스가 시도하였던 새로운 로마 시민권자들을 기존의 35개의 그룹에 배치하는 것을 시도하였다. 이렇게 되자 원로원은 동료 집정관인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를 움직여 거부권을 행사하게 하였고 궁지에 몰린 킨나는 로마를 떠나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들을 방문하며 자신의 정책을 지지해줄 것을 촉구한다. 이런 킨나에게 많은 지지자가 몰렸는데 킨나가 군대를 구성해서 로마를 공격하려고 한다고 생각한 원로원은 그를 집정관직에서 파면키로 하고 그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다. 이렇게 되자 아프리카에 있었던 마리우스가 이탈리아에 자신의 지지자들과 함께 귀국한 뒤 킨나의 세력과 연합한다.[* 이들은 대부분 퇴역병사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 건설했던 식민지 출신이었다. 마리우스의 앞잡이로 활동하던 해방노예 집단인 바르뒤아이도 언급된다.] 원로원도 서둘러 군단을 편성하여 농성했으나, 폼페이우스의 아버지였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모호한 행동 등으로 인해 상황이 불리하게 흘러갔고, 결국 협상하여 이들을 로마 내로 들이게된다. 마리우스와 킨나는 이 과정에서 킨나의 동료 집정관이었던[* 킨나는 옥타비우스와의 정쟁 중에 집정관직을 박탈당했다.]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를 살해하고 대규모 숙청을 벌인다. 그 뒤 킨나와 마리우스는 선거나 정식절차는 안중에도 없이 스스로 집정관직에 올랐다. 킨나에겐 2번째, 마리우스에겐 7번째 집정관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